Rev. 2.73

유래와 본관

청주경씨(淸州慶氏)의 연원을 살펴보면, 옛날 중국 송(宋)대에 하내(河內)지방에 살던 강태사(姜太士)의 후손에서 분파하여 경(慶)씨가 생겨났다. 오래 전부터 여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성씨로 한때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소수만 남은 성씨이다. 현존하는 관향은 청주(淸州) 뿐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경씨의 본관(本貫)은 청주 외에도 청풍(淸風)·평택(平澤)·남원(南原)·부안(扶安)·보성(寶城)·장수(長水) 둥을 비롯하여 14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경씨는 역사상 주로 고려와 조선 전기에 성세를 보인 씨족으로서, 시조로 전하는 경진(慶珍)이 고려 명종 때 정2품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이 유명한 경대승(慶大升)이다. 경진의 후손 경번(慶蕃)이 고려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후 청주에 세거한 후, 후손들이 번(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청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청주경씨대동보소

『청주경씨족보(淸州慶氏族譜)』(상중하 3권, 청주경씨대동보소, 1983)에 따르면 여주의 청주경씨는 제학공파(提學公派), 칠송공파(七松公派), 평택공파(平澤公派), 봉화공파(奉化公派), 진주공파(晉州公派) 등 5개 파로 나뉜다. 시조는 번(蕃)으로 묘는 청원군 남일면 지북리에 있다. 3세 사만(斯萬)의 딸이 재상 한명회의 증조인 점은 당시 이들의 거주지가 서울 부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4세 복흥(復興)의 묘는 장단군 유현(柳峴)에 있으며, 장단군 군내면 방목리(芳木里)에 위토를 두어 이후 이곳에서의 정착기반을 마련한다. 8세 유형(由亨)은 삭령군수(朔寧郡守)를 지냈는데 묘가 여주와 이웃한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에 있다.

청주경씨의 입향은 16세기 초경으로 진산군수(珍山郡守)를 지낸 9세 1남 면(綿, 1532년졸)에서 비롯된다. 그의 묘는 흥천면 상백리(上白里)에 있으며 모재 김안국이 비문을 지었다. 위토는 흥천면 양촌리(楊村里)에 있다. 한편 2남 임(絍)은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냈는데 묘와 위토 모두 경상도 거창군 위천면(渭川面) 당산리(棠山里)에 있으며 그의 손자인 11세 진(震, 1506~1577) 때 역시 이곳 상백리로 들어와 대를 이어가는데, 이들이 진주공파다.

면의 손자 때에 위에서 언급한 4파가 형성되는데, 먼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11세 3남 혼(渾, 1498~1568)의 후손들이 제학공파와 칠송공파을 이루었고, 평택현감을 지낸 4남 잠(潛, 1504~1581)의 후손들은 평택공파를 이루었는데, 흥천면 양촌리에 위토를 두었다. 5남 징(澂, 1507~1574)의 경우는 봉화현감을 지내 그 후손들을 봉화공파로 부른다.

경혼의 자는 언회(彦晦)로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22년(중종 17)에 진사가 되고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병과로 입격하여 검열이 되었다. 장령·헌납·직강을 거쳐 사간원 사간으로서 기묘명현들의 신원(伸寃)을 청하였다. 홍문관 직제학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이조·호조·병조의 참의를 역임한 뒤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오위장이 되기까지 4조(四朝)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묘는 흥천면 상백리에 있다.

제학공파는 흥천면 대당리와 상백리에 근거지가 있고, 칠송공파는 그곳 외에도 청당리 하마옥동에도 거주하고 대당리에 위토가 있다. 평택공파는 흥천면 상백리와 신근리에, 봉화공파는 흥천면 상백리에 거주하고 양촌리에 위토가 있다. 진주공파는 능서면 내양리외 매화리, 흥천면 오근동, 점동면 당진리 등에 분포되어 있다. 대신면 양촌리에도 산다.

『조선의 성』에는 일제 때의 여주지역 성씨분포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청주경씨의 경우 흥천면 양촌리(楊村里)에 22호, 상백리(上白里)에 24호, 그리고 대당리(大塘里)에 17호가 분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족보

淸州 慶氏 上代 系譜(1世~11世)

1世蕃(墓 청원군 남일면 지북리)
3世斯萬(墓 청원군 지북리, 女=韓公義-子 韓脩-子 韓明會)
4世復興(淸原府院君, 貞烈公, 墓 長湍 柳峴, 位土 장단 군내면 芳木里)
5世3男儀(墓 청원군 지북리)
6世習(墓 청원군 지북리)
7世2男餘(墓 파주 신속면 발라산 追遠壇)
8世由亨(朔寧郡守, 墓 양평 옥천면 아신리)
9世1男綿(珍山郡守, 配 丹陽 長氏, 墓 興川面 上白里, 金安國 撰碑, 位土 흥천면 楊村里)
10世世淸(1465~1537, 遺逸로 司憲府 持平, 墓 및 位土 흥천면 상백리, 金安國 撰碑)
11世 3男 渾(1498~1568, 홍문관 副提學, 墓 흥천면 상백리)
12世-1男 時衡(位土 흥천 歸白里) 2男 時成(사간원헌납, 墓 대당리)→提學公派
13世-1男 遴(墓 대당리) 2男 暹(七松公, 墓 대당리)→七松公派
4男 潛(1504~1581, 平澤縣監, 墓 상백리, 位土 흥천면 양촌리)→平澤公派
5男 澂(1507~1574, 奉化縣監, 墓 상백리) →奉化公派
9世2男絍(晋州牧使, 墓 및 位土 경남 거창군 渭川面 棠山里)
10世2男世愼
11世1男震(1506~1577, 副司直, 墓 興川面 上白里 下月谷)→ 晉州公派

淸州 慶氏 支派別 系譜-提學公派(13世~27世)

13世
14世仁後
15世
16世千會(墓 흥천면 莘根里 梧根洞)
17世2男
26世泰顯(墓 淸塘里 案山) / 大塘里 / 莘根里
27世奎宣(1957)

淸州 慶氏 支派別 系譜-七松公派(13世~26世)

13世暹(七松公)
14世1男有後
15世3男寅(1614~1693, 墓 흥천면 莘根里 梧根洞) 4男 冣(예문관직제학, 墓 積城郡 舘洞)
16世4男三會
17世曙(墓 흥천면 淸塘里 下馬玉洞 / 位土 大塘里)
24世奎浩(墓 淸塘里) / 大塘里 / 莘根里
25世達秀(1928)
26世伯顯

淸州 慶氏 支派別 系譜-平澤公派(11世~26世)

11世4男潛(平澤公)
12世3男時弘
13世1男3男
14世1男必後2男 履後
15世1男 2男3男 寯
16世1男瑞會1男 胤會 2男 光會 3男 台會 4男 禮會1男 章會
25世昌秀恩秀(1936, 흥천 상백리)
26世德顯(1938)

淸州 慶氏 支派別 系譜-奉化公派(11世~25世)

11世5男澂(奉化公)
12世1男時康(1548~1635, 副護軍, 位土 흥천면 陽村里)
13世1男2男 進(墓 흥천면 상백리 월곡)
14世1男宗後 1男 應後
15世1男1男 審
16世1男翼會2男 賢會 1男 碩會
24世然浩(墓 상백리 월곡)
25世 德秀(1952)

淸州 慶氏 支派別 系譜-晋州公派(12世~25世)

12世時宏(生父 平澤公 潛, 墓 興川面 上白里 月谷)
13世1男述(1565~1645, 墓 陵西面 內安洞)2男 逑(墓 陵西面 梅花里)
14世1男流後(1591~1669, 墓 능서면 落鷹坪)1男 隆後
15世1男2男 櫅 2男 穳(墓 점동면 院井里)
16世1男泰會(흥천면 오근동)1男 觀會(오근동)1男 善賀(점동면 辰頭如沙谷, 位土 唐辰里)
2男益會(上同)
23世錫奎(墓 莘根里)
24世良浩(1924)
25世澤秀(1944)

출처 : 여주지역족보

항렬표

16 17 18 19 20 21 22 23
항렬자 상휴 성래 시신 래이 대성
(祥休) (聖來) (時善) (來履) (大星) (再) (重) (錫)
24 25 26 27 28 29 30 31
항렬자 기수 현문 규광 구윤 제준 근식 보익
(浩) (箕秀) (顯文) (奎匡) (九允) (濟濬) (根植) (普益)

파명록

청주경씨는 부패한 세도에 용기 있는 저항으로 무맥(武脈)을 이어오면서 고려중기에서부터 조선전기에까지 가문의 성세를 보여온 명문가였다. 그이후 청주경씨는 7세부터 15세까지 분파하여 20개 종파가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청주경씨는 3,462가구 총 11,12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파조 파명
경연(慶延) 징군파(徵君派) 춘천부사
경수(慶脩) 청안공파(淸安公派) 청안현감
경준(慶俊) 서봉공파(西峯公派) 좌부승지
경수공(慶秀恭) 교리공파(校理公派) 홍문관 교리
경상(慶祥) 월송공파(月松公派) 덕천군수
경조(慶祚) 도사공파 의빈도사
경상용(慶翔龍) 적성공파(積城公派) 적성현감
경시경(慶時經) 경력공파(經歷公派) 경력관
경달(慶達) 아산공파(牙山公派) 아산현감
경혼(慶渾) 제학공파(提學公派) 좌부승지
경섬(慶暹) 칠송공파(七松公派) 호조참판
경취(慶취) 신강공파(新江公派) 도승지
경민(慶민) 처사공파 숭정처사
경대후(慶大後) 세마공파(洗馬公派) 진사세마
경잠(慶潛) 평택공파(平澤公派) 평택현감
경징(慶징) 봉화공파(奉化公派) 봉화현감
경임(慶임) 진주공파(晉州公派) 진주목사
경종지(慶宗智) 낭성군파 임실 현감
경유돈(慶由惇) 보성공파(寶城公派) 보성군수
경유공(慶由恭) 병사공파(兵使公派) 의주목사

역사속 인물

무인시대에 경진(청주경씨 시조)과 경대승이 등장하고 경대승이 죽은 후 3, 40년 사이의 세계가 또 실전되었다. 고종조에 제주도 수령 경세봉과 낭장 경원록등이 사기(史記)에 보이나 대수를 알지 못하여 고종조에 호부상서를 지낸 경번을 1세로 하고, 증손 경복흥이 청원(청주의 옛이름)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청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 경진(慶珍): 청주경씨의 시조로 고려 명종때 윤인첨의 막하에서 우군병마사가 되어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지문하성사(종 2품 벼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 경대승(慶大升): 일찍이 큰뜻을 품고 아버지가 불법으로 탈취한 토지를 군에 바치고 하나도 취하지 않아 청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5세에 음서로 교위에 임명된 뒤 차차 벼슬이 올라 장군이 되었다. 1178년(명종 8) 집권 무신들의 횡포에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균과 송유인등을 죽이고 26세 젊은 나이에 정권을 장악했다 왕이 내리는 벼슬도 모두 거절했으며 외모 또한 옥골선풍에 풍채도 뛰어났다 30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의롭게만 살았고 경대승이 죽었을땐 만백성들이 통곡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후대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무인집권자들에 대한 평가에서 유일하게 충신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 경번(慶蕃): 청주경씨 1세, 고려 고종조 호부상서
  • 경사만(慶斯萬): 좌시중으로 번(蕃)의 손자이며 복흥(復興)의 아버지이다. 성품이 소박하였고 명덕태후의 조카사위로 1321년에 좌부대언이 되고, 1324년에 우대언이 되었다. 충숙왕이 참소를 받아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호군 김인연(金仁沇) 등과 왕의 환국을 요청했는데, 이것으로 심왕 고(瀋王暠)일파의 미움을 받아 순군에 갇히기도 했다. 또,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본국에서 왕에게 보내는 모든수송을 관리했다.
  • 경복흥(慶復興): 선조들의 의(義)로운 혈통을 이어받아, 조정에서 도성수축의 논의가 일어나자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중지하게 했으며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어 북방을 방어했다. 공민왕때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로 세도를 남용하여 임금을 좌지우지했던 기철(寄 轍)일당을 퇴살하여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또한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1361년에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을 호종하여 복주(지금의 안동)로 난을 피했고 이어 1363년(공민왕 12) 명장 최 영 등과 함께 덕흥군을 받들고 왕조에 반기를 든 최 유(崔 濡)를 물리쳐 문하부의 으뜸 벼슬인 좌시중에 올랐다. 또 신 돈(辛 旽)의 세도를 제거하려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후 청원부원군에 봉해짐에 따라 본관을 청주(淸州)로 삼게 되었다.
  • 경보(慶補): 복흥(復興)의 맏아들로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 조선개국에 공을 세우고, 태종때 검교좌정승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 경진(慶臻): 복흥(復興)의 둘째아들로 정3품 정의대부에 올라 예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 경의(慶儀): 복흥(復興)의 세째아들로 1388년 좌군도통사 조민수 휘하 계림원수로서 요동정벌에 출정하였다.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의 집권과정에서 일시 소외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 무진회군공신에 녹훈되었다. 1392년(태조 1)6월 문하평리로서 중국 남경에 파견되었으며 1393년 7월 참찬문하부사로서 회군이등공신에 녹훈되고, 같은해 12월 하정사로서 요동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뒤 서북면병마도절제사로 평양윤을 겸하였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경유공(慶由恭): 병사공파 파조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도총사 이준의 군관으로 토벌에 참가하고, 이어서 건주야인(建州野人)정벌에 나아가 큰공을 세웠다 1469년(예종 1) 남이옥사에 연루되어 가산을 적몰당하고 관노가 되었다가 1470년 성종의 즉위로 다시 기용, 가위장이 되고, 가산·노비 등을 환급받았다. 1472년 안주목사, 1475년 행호군등을 역임하고 1478년 경흥도호부사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곧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고 1480년 치중장으로 야인정벌에 참전, 공을 세워 가삼자가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 1483년 다시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484년 영안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89년 의주목사가 되었으며, 1494년 행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 경준(慶俊): 서봉공파 파조 1476년(성종 7) 사헌부장령이 되어 허찬, 최영호, 서거정, 현석규,임사홍을 탄핵하였다. 이어 사간원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양성지가 대사헌에 제수되자,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그뒤 권력을 농단하며 살인을 자행한 창원군 성(晟)을 탄핵하였고, 또한 당시 지방행정관의 무능함을 지적, 수령의 포폄(褒貶)을 요청하였다. 그밖에 공주들의 가옥이 너무 화려함을 논박하였고, 강원도민의 자염(煮鹽)폐단을 지적하였으며, 대신 김국광의 탐오함을 탄핵하였다. 1483년 충주목사에 제수되어, 3년 동안 재임하면서 형옥과 농정 등에 있어 선정을 폈다. 그 공로로서 당상관에 올랐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장례원판결사가 되었다. 1487년 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성품이 현철하였고 강직하였으며, 직무에 밝고 성실하였다.
  • 경연(慶延): 징군파 파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평생동안 정성껏 모셨다. 특히, 아버지의 병환을 구하기 위하여 한겨울에 잉어를 잡아바친 일화가 전한다. 일찍이 생원이 되었으며 그의 효행을 듣고 세조가 그를 기용하기 위하여 불렀으나 나가지 않다가, 1476년 성종의 부름을 받고 사재감주부가 되었다. 성종이 불러들여 효행에 대해 묻자, 마음속에 순(舜)임금의 대효(大孝)와 주공(周公)의 충성을 으뜸으로 간직하고 있으나, 자신은 거기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산현감과 춘천부사에 역임하였다. 경연의 효행은 드라마로도 많이 나오고 또한 청주에 효촌이란 마을이름이 생겨나게 한 장본인 이기도하다.
  • 경세창(慶世昌): 1504년(연산군 10) 이세좌의 옥사에 연루되어 온성·영월 등지로 유배되었다. 중종 때에 관직이 회복되어 홍문관 교리·부응교, 사헌부 장령·집의 등을 거쳐 1510년(중종 5)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어 대사간·도승지·황해도관찰사·한성부좌윤·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대사간으로 있던 1512년에는 간쟁을 용납할 것과 사치를 금할 것, 문교(文敎)를 중시할 것, 무비(武備)를 엄히 할 것 등의 10개조에 걸친 정책을 왕에게 상소한 바 있다.
  • 경세인(慶世仁): 군수 경상의 아들이며 경세창의 아우로 어려서부터 조광조(趙光祖)·김대성(金大成)과 막역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519년(중종 14)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관에 들어갔다. 이어 정자·저작을 역임하고, 박사가 되어 경연에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에 힘썼다. 같은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된 뒤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책을 읽고 읊으며 지냈다. 김안로에게 모함을 받아 명천으로 귀양갔고 오결의 탄핵을 받았으나 1538년 석방되어 파주의 두문리에 ‘두문농은(斗文農隱)’이란 농막을 짓고 살면서 평생을 마쳤다. 저서로 《경재유고》·《경연강독록 經筵講讀錄》이 있다.
  • 경혼(慶渾): 제학공파 파조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44년 사간원사간으로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등의 신원을 청하였다. 그뒤 시강원우필선·사헌부집의·승문원판교를 역임하였으며, 홍문관직제학으로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1547년(명종 2) 병조참지,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고, 병조참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1551년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를 중용하고 선교양종의 선과를 설치하려 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기신재의 시행도 적극 반대하였다. 그뒤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이조·호조·병조의 참의를 역임한 뒤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는 4조(四朝)에 걸쳐 벼슬하였으며, 언관(言官)으로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 경섬(慶暹): 칠송공파 파조 경혼의 손자로 진주사(중국에 주문을 갖고 가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남원 부사를 지내고, 홍문관교리로서 통신사 여우길의 부사가 되어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후 첫번째 사절로 단절된 국교를 다시 열게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의 포로 1340명을 데리고 돌아와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다 1618년(광해군 10)호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장례원행판결사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나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부제학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 경선행(慶善行): 1616(광해군 8) 조선시대의 수학자. 그는 활인서(活人署)의 별제로 사회에 널리 알려진 산학자(算學者)였다. 김시진의 《산학계몽》 중간본의 출간에 있어서는 국초 인본을 입수하여 간행하였는데, 그 서문에는“지부회사(地部會士)였던 경선행이 파손된 부분을 본래의 모습대로 바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최석정의 《구수략》에는 “동국(한국)의 대표적인 수학자”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산학자들의 약력을 소개한 《주학입격안》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전형적인 중인출신 산학자로서 그가 저술한 산서(算書)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묵사집 》뿐이다.
  • 경취(慶취): 신강공파 파조 1653년(효종 4)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정으로 재직중 165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0년(현종 1)지평이 된 뒤 겸춘추·정언·호남경시관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1667년 사은 겸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다시 정언이 되었으며 장령·승지 등을 거쳐, 1676년(숙종 2)경기도관찰사가 되었고, 1678년 충청도관찰사로 전직하였으며, 그뒤 도승지·판결사등을 역임하였다.
  • 경구(慶구): 1712(숙종 38) 조선 후기의 의관 1735년(영조 11)에 증광의과에 합격하여 영조조에 수의(首醫)가 되었다. 그뒤 현령·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경권중(慶權重): 일제 침략시 의병장, 1907년 고향(충북 괴산)에서 의병을 모아 구례·곡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1919년 3·1 운동 때는 선봉에 섰다가 체포되어 옥사했다.

출처: 청주경씨사이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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